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시다 요시오 (문단 편집) === 한신 감독 2기 === [[파일:85한신.jpg]] 1985년 한신의 사상 첫 [[일본시리즈]] 우승이 결정된 후 [[헹가래]]를 받는 장면. 이후 해설가로 일하다가 1985년 다시 한신의 감독으로 복귀[* 애초에 한신은 [[한큐 브레이브스]], [[킨테츠 버팔로즈]]를 첫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던 명장 [[니시모토 유키오]]를 감독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이를 거절한 니시모토가 대신 요시다를 추천한 것이 감독 복귀의 계기가 되었다.]했다. 시즌 전에는 [[랜디 바스]]의 재계약을 강력히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고, 당시까지 유망주에만 그치고 있던 포수 [[키도 카츠히코]]를 주전으로 낙점해서 개막을 맞이했다. 그리고, 그 해 한신은 [[랜디 바스]]-[[카케후 마사유키]]-[[오카다 아키노부]]로 이어지는 [[백스크린 3연발|레전드]]급 [[클린업 트리오]]를 주축으로 한 이른바 '''[[https://ja.wikipedia.org/wiki/%E3%83%8B%E3%83%A5%E3%83%BC%E3%83%80%E3%82%A4%E3%83%8A%E3%83%9E%E3%82%A4%E3%83%88%E6%89%93%E7%B7%9A|뉴 다이너마이트 타선]]'''을 앞세워 1964년 이래 21년 만의 [[센트럴 리그]] 우승을 차지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본시리즈 에서 [[세이부 라이온즈]]를 4승 2패로 일축하고 구단 사상 최초의 [[1985년 일본시리즈|일본시리즈]] 제패를 이룩하였다.[* 당시 세이부 감독은 현역 시절 라이벌이었던 [[히로오카 타츠로]]였다. 히로오카는 이 해를 끝으로 감독직을 사임했다.] 한신 우승 당시 [[오사카]]를 비롯한 [[간사이]] 지방 전역에서 우승의 희열을 이기지 못한 [[한신아재|한신 광팬]]들이 [[도톤보리강]]에 뛰어들고 거리의 간판과 기물, 다수의 차량이 파손되는 등 축제를 넘어 거의 폭동에 가까운 분위기로 들썩일 정도로 한신의 우승은 큰 센세이션을 일으킨 대 사건이었다.[* 그러나 우승 뒤 흥분한 나머지 한신 팬들에게 사랑받던 [[랜디 바스]]를 닮았다 하여 팬들이 [[켄터키 프라이드 치킨|어느 통닭집]]의 [[할랜드 샌더스|호호백발 할아버지]]의 마네킹을 [[도톤보리강]]에 집어던진 뒤 타이거스의 1987~2002년의 16년간의 [[4466566664|암흑기]]가 찾아온, 이른바 '''"[[커널 샌더스의 저주]]"'''가 시작된 것이 이 때였다.] 이듬해 리그 연패를 노리며 1986년 시즌을 맞았고 중심타자 바스가 지난해에 이어 2년 연속 [[트리플 크라운|타격 삼관왕]]을 석권하는 등 변함없이 맹활약 했지만 주포 카케후가 손가락 부상으로 결장하고 요시다는 투수기용 문제로 투수코치인 [[요네다 테츠야]], 타격 코치 보좌역 [[타케노우치 마사시]]와 대립하는 등 내홍을 일으키면서 정확히 승률 5할로 리그 3위에 그쳤으며, 1987년엔 구단 사상 최악의 승률인 '''0.331'''을 찍으며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는 쓴잔을 들이키고 요시다는 또다시 감독직에서 물러나야 했다.[* 이 해 요시다의 등번호였던 23번이 영구 결번이 되었다.] 다만 이 시기의 요시다는 처음으로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했는데도 불구, 언론과의 험악한 관계로 인해 우승 감독으로 대우받긴 커녕 오히려 사소한 발언도 왜곡 보도되며 피해를 보는 등 다소 억울한 면도 있었다고 한다. 2번째 감독 퇴임 후 1989년 [[프랑스]]로 건너가 이듬해인 1990년 [[프랑스 야구 국가대표팀]] 감독 겸 파리 대학 야구부 감독을 맡아 1993년 까지 파리 대학 감독을, 1995년까지 프랑스 대표팀 감독을 역임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